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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보험의 뿌리를 찾아서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가다

올해로 건강보험 제도 시행 36주년을 맞이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36년간의 여정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려보고자 건강보험의 뿌리를 찾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주축이었던 김영환 선생(84세)을 만나러 부산으로 향했다. 김영환 선생이 들려주는 의료보험의 태동과 확대, 그리고 애정이 듬뿍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연욱 기자 사진 백기광 STUDIO 100

국민건강보험의 뿌리를 찾아서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가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간 내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한 나라. 우리 건강보험에 대한 평가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500인 이상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을 시작하여 12년만인 1989년에 전국민의료보험을 달성했다. 건강보험의 역사 속엔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담겨 있다. 특히,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되고 1977년 의무보험이 시작 될 때까지 비록 적은 숫자였지만 전국에 걸쳐 임의 의료보험조합들이 운영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고 장기려 박사가 주축이 된 자발적 자영자조합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야말로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탄생! 그러나…

1960년대 우리 사회는 한국 전쟁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당시 장기려 박사는 농촌운동가였던 채규철 선생으로부터 서구 의료보장제도를 소개 받고 가난때문에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위한 조직을 만들고자 하였다.
우선 부산지역 성경 연구 모임인 '부산모임'에 의료보험제도와 조합의 취지를 설명하고 부산 시내 100여 교회에 취지문을 보낸 결과 23개 교회의 대표자들이 조합에 참여 의사를 밝혀 왔다. 그렇게 1968년 5월 13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다. 명칭은 미국의 기독교 정신으로 시작된 의료보험제도인 '청십자운동(Blue Cross Movement)'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 100원 정도였는데, 보험료는 비교적 저렴한 1인당 60원으로 책정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보험료 부담에 회의적이었고, 의료보험에 대한 낮은 인식과 경험 부족, 재정난 등으로 가입자 모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무진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의료보험의 취지를 설명하며 참여를 독려하고 소식지 '청십자 뉴스'를 만들어 조합원 가정에 발송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했으나 조합의 사정은 쉽게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기려 박사와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든 장본인인 김영환 선생.

사회복지사 김영환 선생, 기폭제를 마련하다

당시 스웨덴 아동구호연맹(SSCF, SWedish Save the Children Fedreation)에서 한국 총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김영환 선생은 장기려 박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즉,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의 피보조자(Client)를 중심으로 1969년 2월에 설립된 '부산의료협동조합'과 통합하고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이를 통해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만 4,000명의 조합원이 확보되었고 그 후 자영자 의료보험 시범기관으로 지정받아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안정적 운영을 해 나가게 되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와 사회복지사의 선구자 김영환 선생, 두 사람의 만남이 기폭제가 되어 조합은 한층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김영환 선생은 당시를, "가가호호 방문을 하면서 보험 가입을 독려하고, 또 보험금을 징수 했어요.
겨울이면 들어오라고 해서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고, 더운 여름엔 시원한 물 한 잔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들었지만 보람도 느끼며 일했지요"라며 회상한다.
1975년 8월 조합 직영병원인 '청십자병원'을 개원하면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청십자병원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대지 100평, 건평 200평의 병원을 짓는 데 5,000만 원 정도가 들었어요.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에서 절반을 지원해 주었고, 나머지는 조합에서 조달 했어요. 조합원들은 '내 병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진료비를 감액해주기도 해 재정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자체적으로 진료비를 청구 받아 심사하는 '자체 진료비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적정 진료 및 효과적인 보험급여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진료기관과의 신뢰관계도 돈독히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부산청십자의료보험의 성공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청십자조합을 모델로 한 지역 의료보험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해 서울, 광주, 인천, 수원, 제주,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조합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부산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20년 동안 조합원들이 힘을 합쳐 한결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부의 축적이나 명예의 추구, 가시적인 실적 등에 매달리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할 일에 매진한 결과, 1989년도 조합을 해체하기 직전에는 무려 23만 명의 조합원이 있을 정도였지요."
1989년 7월 1일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비롯한 여러 민간조합의 경험은 고스란히 정부로 넘겨지게 되었다. 장기려 박사는 기꺼이 나라가 하는 일에 동참하고자 조합의 해산을 선언했고, 23만 명의 조합원들도 그 뜻을 받아들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합을 정부에 넘기고 해산한 지도 25년이 지났어요. 의료보험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많은 노력을 들여 발전시켰기에 지금의 건강보험에 거는 기대가 상당히 큽니다."며 김영환 선생은 건강보험공단에 당부의 말씀을 빼놓지 않는다.
"공단 직영병원이 좀 더 설립되었으면 좋겠어요. 청십자병원의 선례를 봤을 때 기준 병원으로서 다른 요양기관에 주는 효과가 매우 크죠. 또 하나는 공단의 사전관리 노력이 필요해요. 자격이나 상해요인에서의 사전관리가 제대로 되어야만 사후관리를 위한 인적·물적 비용의 낭비를 줄일 수 있어요."

1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만든 부산 소재 청십자병원. 2 1987년 8월 18일 사무실을 확장 이전 한 후 가진 현판식. 가장 왼쪽이 김영환 선생, 세번째가 고 장기려 박사다. 3 1988년 부산청십자 의료보험 수첩.

4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역사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는 ‛청십자의료보험통감'. 5 의료협동조합 설립 후 조합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나눔의 정신을 잇다

김영환 선생은 의료보험조합을 해산한 뒤 신용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현재 부산진역 앞에 자리 잡은 청십자신용협동조합에는 9,500명의 조합원이 모여 청십자운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76년 의료협동조합 외에 경제협동조합을 출범하자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신협은 장기려 박사의 나눔 정신을 계승하며 지역사회 공헌과 사회에 책임을 다하고 있다.
치료비가 없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나눔의 정신을 이어가며 의료복지를 이루어낸 그들의 정신은 현재의 건강보험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그 때의 순수한 나눔 정신까지 이어간다면 국민의 행복을 위한 든든한 건강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icon

장기려 박사를 기려요

부산 동구 초량동 '더나눔 센터'

더나눔 센터

부산 동구 초량동 고갯길을 따라 올라가다 화신아파트 아래에 이르면 보이는 더나눔센터. '돈이 없어 치료를 못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며 평생 나눔의 삶을 실천한장기려 박사의 기념관이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나고야 국제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한 장기려 박사는 국내 최초 간암의 설상절제수술에 성공한 최고의 의사이자 의술을 인술로 베푼, 가난한 이들의 의사였다. 이곳에는 소외된 이웃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면서 진정한 봉사의 삶을 살다간 '참의사' 장기려 박사의 일대기와 그의 의사 가운, 청진기, 진료 노트 등을 전시, 장박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게 꾸며 놓았다.
'지금 이 문으로 빨리 나가면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이오. 집에서 푹 쉬면서 이 약을 먹으면 차도가 있을 것이나 며칠 뒤에 다시 찾아 주시오. 돈이 없어도 되니 꼭 오셔야 하오.'
치료를 받고 돈이 없어 눈치만 보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이같이 말한 장기려 박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막사이사이 상' 수상을 거절하려 했으나 당시 조합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수상을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또 어떠한가.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삶을 살며 자신은 집 한 칸, 재산 하나 없이 부산 복음병원에서 마련해 준 병원 옥상의 관사에서 청렴한 삶을 살며 환자들과 생활했다.
그의 나눔의 삶을 기리고자 건립한 더나눔 센터는 장기려 박사 기념관과 더불어 건강나눔방, 마음나눔방, 동화책방, 일자리나눔방, 그리고 작은 북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생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며 인술을 펼친 장기려 박사의 나눔정신이 배어 있는 더나눔 센터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나누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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